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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림 선생의 동대문시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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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수많은 개인 디자이너들이라면 좋건 싫건 거쳐 가야만 하는 공포의 장소(?)가 하나 있다.

우선, 이 공간을 접해보지 않았을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풀어보자면 동대문 종합시장은 원단, 부자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시장이다.

흔히 동대문 시장이라 하면 옷을 판매하는 도매시장을 의미하지만, 우리같은 ‘업자’들에게 동대문 시장은 옷을 만들기 위한 원단과 단추나 지퍼를 포함한 온갖 부자재를 판매하는 ‘종합시장’을 의미한다.

우선 동대문 시장은 홈페이지에 따르면 대지면적 5천여 평에 건평은 2만여 평에 이르며 A,B,C,D동과 신관까지 총 5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안에 입점한 원부자재 업체만 4천 3백여 개, 근무자 수는 5만여 명에 하루 방문자 수만 20만여 명에 이른다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라 할 수 있다.

세계를 놓고 봐도 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국 정도를 제외하면 동대문만큼 큰 규모에 산업 전체가 이렇게 밀집해있는 곳은 찾기가 힘들다고 하니, 인프라로만 따지면 대한민국 패션 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 겉으로 보이는 규모로만 보면 세계 어느 곳도 부럽지 않은 수준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왜 아직도 한국에서는 샤넬이나 구찌같은 브랜드는 물론이고 규모는 작아도 개성 강하고 특색있는 브랜드들이, 그런 디자이너들이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뉴욕을 예로 들어보자. 뉴욕의 패션 산업은 맨하탄의 ‘패션 디스트릭트’라는 구역에 밀집되어 있다.

패션 디스트릭트는 맨하탄 5애비뉴에서 9애비뉴, 34번가에서 42번가에 걸친 약 2.6㎢ 정도의 구역으로, 이 안에 패션 브랜드 사무실과 작은 규모의 (하지만 나름대로 역사가 있는) 공장들, 그리고 원부자재 업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물론 뉴욕은 패션 산업의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파리나 런던에 비해서는 훨씬 업체의 수도 많고, 모여있는 편이긴 해도 동대문 종합시장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다.

거긴 있고 여긴 없는 것

다만, 뉴욕에는 있는데 동대문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좋은 원부자재를 취급하는 소매상’이다. ‘프로젝트 런웨이’의 미국판을 시청했던 분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Mood’라는 원단가게.

패션 디스트릭트 안에 위치한 Mood는 다양한 원단을 갖춰놓고 있는데, 다양한 원단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대문 종합시장의 널리고 널린 원단 가게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어 보이지만, 이 곳에선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독특하거나 퀄리티가 좋은 원단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

야드당 3~4만 원대의 울이나 리버티의 원단들, 해리스 트위드나 로캐론 오브 스코틀랜드의 타탄 원단, 재미있는 프린트의 온갖 원단들을 갖춰놓고 있기 때문에 무드를 돌아다니다보면 디자인적인 영감은 저절로 마음껏 떠오르게 된다.

무드보다 훨씬 고급 원단을 취급하는 ‘B&J’, 스왈로브스키 크리스털부터 고급 부자재만을 취급하는 ‘M&J Trimmings’ 등 뉴욕에는 단순히 매스마켓용 원단과 부자재를 취급하는 B2B업체들 외에도 가격대나 개성에 따라 여러 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가게들이 존재한다.

반면, 동대문 종합시장에는 이런 개성 있는 업체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이 아쉽다.

뉴욕에는 마크 제이콥스나 랄프 로렌, 톰 브라운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브랜드들도 많지만, 수많은 인종과 개성이 있는 도시인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개성과 타깃이 명확한 개인 디자이너들도 엄청나게 많다.

그런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단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 결코 허접하거나 싸구려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희소성 있고 특색 있는 디자인을 선보이는 만큼 원단이나 부자재의 디테일은 오히려 하이엔드 브랜드들보다도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이런 브랜드들과 디자이너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성비 좋고 잘 팔리는 것들이 아니라 좀 더 비싸더라도 특색 있는 것, 고급스러운 것들일 것이다.

우리라고 별로 다르지는 않다

한국에서도 작은 브랜드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디자인의 독창성이다. 그리고 디자인의 독창성에 어쩌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원단일 것이다.

질 샌더는 한 인터뷰에서 “컬렉션을 꾸릴 때, 소재의 선택이 끝나면 컬렉션은 이미 반 이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원부자재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동대문 종합시장에서는 ‘좋은 원단’과 ‘좋은 부자재’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필자가 서울 컬렉션을 준비하던 시기에 재미있는 질감의 100% 울 소재를 찾기 위해 동대문 종합시장과 광장시장까지 3일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100% 울 원단을 파는 곳 자체가 10여 군데 밖에 되지도 않는데다, 갖추고 있는 원단들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결국은 컬렉션을 위해 뉴욕의 B&J 온라인 몰에서 주문해서 사용했던 경험이 있다.

또 다른 기억 하나

한 대학교의 졸업 작품전에 초대되었던 적이 있다.

아주 멋진 드레스를 보면서 ‘와, 이게 진짜 학생 작품이라고?’라고 생각하던 즈음,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드레스 원단의 컬러감과 텍스쳐는 훌륭했지만, 옷을 만들기에는 부적절할 정도로 너무 두꺼워서 드레스의 주름이 마치 군용 코트처럼 투박하게 잡혔고, 지나치게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그 드레스를 제작한 학생에게 원단이 부적절했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 알게 된 사실은, 드레스와 원단 두께 간의 상관관계를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콘셉트에 가장 적절한 원단을 찾기 위해 동대문 종합 시장을 수도 없이 돌아다녔지만, 이 원단만큼 그 느낌을 살려주는 원단을 찾아내지 못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학생이 사용한 원단은 옷을 만드는 원단이 아니라 커튼을 만들 때 주로 사용하는 원단이었다. 얼마나 많이 들어왔고 또 누구나 알고 있는 식상하고 상투적인 표현이란 말인가.

‘기본이 중요하다’

때가 되면 항상 ‘세계 5대 패션위크’ 혹은 ‘K-패션’ 운운하면서 마치 한국 패션 산업이 이제는 꽃을 피울 때가 되었고, 모든 준비가 마쳐진 것처럼 일컬어지곤 한다.

하지만 몇 년 후에 디자이너가 되어 각 분야에서 활동하게 될 이 학생들은 다양하고 개성 있는 각종 원부자재를 경험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자신의 졸업 작품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커튼 원단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저 그런 원단을, 그저 그런 단추들과 싸구려 부자재들만 보고 사용하면서 패션을 공부한 학생들과 전 세계의 좋다는 원부자재는 다 만져보고 사용해보면서 공부한 학생들. 과연 어느 쪽에서 개성 있는 디자이너가 발굴될 수 있을까?

파슨스의 한 수업 시간에 ‘왜 뉴욕 디자이너들은 파리나 밀라노 출신의 유럽인들에 비해 여전히 어딘가 모자랄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한 학생은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파리의 디자이너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예술적인 파리의 풍경을 보면서 감각을 익혀요. 그들은 샹젤리제 거리를 걷고 수 백 년 된 파리의 건물들 사이를 걸어 다니죠."

"밀라노나 로마의 아이들도 태어나면서부터 보는 것들이 전부 그런 것들이기도 하고요. 근본적으로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예술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데, 우리 미국인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 차이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https://fpost.co.kr/board/bbs/board.php?bo_table=fsp25&wr_id=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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